[이사야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열왕기상 18: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1. 교만을 가장 싫어하시는 하나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심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교만이 사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한 이유는 ‘교만’이다.
[이사야 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위 구절은 바벨론 왕들의 타락과 교만에 대한 묘사이지만(바벨론 왕은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자신의 권력을 절대화하려고 했음) 사탄의 본성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주목할 것은 교만한 자가 마지막에는 맨 밑으로 떨어짐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에스겔 28: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위 구절은 두로 왕의 타락과 교만(자신을 신격화)에 대한 구절이지만 이사야 14장의 말씀처럼 타락한 사탄의 교만한 본성에 대한 구절이다. 교만의 결과는 땅에 던져져 왕들 앞에서 구경거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17절에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했다’를 주목해야 한다. 아름다움은 좋은 것이다. 아름다움과 교만은 어떤 상관관계일까?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자기 자신에 취한 아름다움’이다. 자기 자신이 너무 아름답고 빛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최고이다. 견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말, 행동, 생각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2. 욕망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교만해진다
바닥에 있을 때 교만한 사람을 보았는가?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교만한 것을 보았는가? 탕자를 보라.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그는 교만해졌다. 그래서 아버지 집을 나간 것이다. 바리새인을 보라. 자신이 거룩하다고 하는 ‘자기 의’가 언제 드러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법을 지켰을 때이다. 스스로 결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를 성경은 교만하다고 말씀한다. 인간은 왜 오히려 힘이 있고, 아름답고, 성공했을 때 교만에 빠지게 될까? 말씀에 보면 선 줄로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 교만은 영적인 문제이다
교만을 인간의 이성과 지성에 기초한 ‘이해’의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영적인 문제이다. 영적인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영역이다. 높은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존재, 사탄의 본성이 ‘교만’이기 때문이다. 교만은 영적인 문제이다.
(2) 교만의 출발은 욕망이다
교만의 출발은 에덴 동산의 선악과에서 찾을 수 있다. 선악과 사건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생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는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제거 대상이 된다. 이 모든 생각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의 생각의 출발은 인간의 ‘욕망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욕망은 욕심이다. 욕심은 만족하지 못하는 불평의 마음이다.
[야고보서 1:14-15]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4절 -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미혹을 받은 원인은 ‘자기 욕심’ 때문이다. 참 놀라운 말씀이다. 미혹의 출처가 자기 욕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누가 미혹을 당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누구나 미혹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이 있는 사람이 미혹을 당하는 것이다. 자기 욕심이 없이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한 사람, 사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 미혹을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 없는 마음이 욕심의 정체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욕심을 부릴 수 없다. 그가 만족하는 이유는 ‘있어도’, ‘없어도’의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에 그는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7: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누가복음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존재는 소유를 포함한다. 소유는 존재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의 본성은 하나님 없는 마음이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욕심은 죄를 잉태한다. 욕심의 본성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없는 마음이다. 그래서 자기 능력에 집착하고 소유에 집착한다. 그래서 사심이 있는 마음, 야망이 있는 마음, 순결하고 청결하지 않는 마음이 된다.
3. 교만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 시편 2편
[시편 2:1-4]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마지막 때는 심판의 때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심판하실까?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의 대상은 ‘교만’이다.
1절 - 이방 나라는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들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공동체, 집단, 족속, 나라가 분노한다. 분노하는 이유는 교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헛된 일을 꾸민다. 교만은 결국 헛된 일을 만든다. 헛된 일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일이고, 꾸민다는 것은 음흉하게 계략을 만든다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들나귀와 같다. 목적을 위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분노’
이들은 분노한다.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의 동기는 분노가 아님을 명심하라. 분노는 대적하는 마음이다. 가인의 마음에 숨겨진 것은 분노였다. 그래서 그의 안색이 변한 것이다. 나곤의 타작마당 사건을 통해 다윗의 마음 가운데 드러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숨은 동기를 드러내신 것이다.
2절 - 세상의 군왕들이란 각 영역의 최고 고지에 있는 권력자들이다. 관원은 행정력을 장악한 사람들이다. 즉 실행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서로 꾀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대적한다.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법, 문화, 경제, 정치 영역의 일은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대적한다.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이유는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이다. 기름 부음이란 권위와 능력을 말한다. 기름 부음이 있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고, 그 권위에 능력이 있다. 능력은 변화시키는 힘이다. 그래서 세상의 군왕들이 대적한다.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고 권력과 통치권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적하고 격렬히 저항하는 것이다.
3절 -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목표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바벨탑과 똑같다. 그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타락한 사람의 마지막 목표는 늘 하나님을 벗어나는 것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이 자유의 동기는 하나님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이 되면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 모든 영역에 하나님을 벗어나는 법과 문화를 만든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교만’이라고 한다.
4절 - 교만을 향한 하나님의 처방은 비웃음이다. 개미가 자신보다 수백 배 큰 사람을 이기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비웃음은 무시하는 마음이다. 인간의 교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구절임을 명심하자.
4.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한다.
성경에 이와 비슷한 때가 있다. 엘리야의 때이다. 엘리야의 때는 교만의 때이다. 교만의 상징인 우상 숭배가 가장 강력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의 모양이다. 교만했기 때문에 땅이 비가 내리지 않는 저주를 입었다. 이때 땅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는 하늘에 있다.
(1) 땅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하늘에 있음을 명심하자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땅이 메말라 소산물을 낼 수 없는 실제적 고통의 때의 원인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2) 갈멜산의 단판이 문제를 해결한다
엘리야 시대의 교만과 거짓의 핵심은 타락한 지도자 아합과 이세벨의 문제였다. 특히 이세벨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색출해 죽인 악의 화신과 같은 존재였다. (마지막 때 이세벨의 영이 움직인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어렵게 하고 환난과 핍박을 주는 영의 실체가 이세벨, 사탄의 영이다)
‘단판’
그리스도인들이 단판을 지어야 할 때가 있다. 단판은 승부처이다. 승부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물러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갈멜산은 물러서지 말아야 할 승부처이다. 단판의 때는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움직여서 승부를 보아야 한다. 오늘 엘리야가 단판의 장소, 갈멜산까지 가는 문을 연 사람이 ‘오바댜’이다. 오바댜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바댜’
[열왕기상 18:3-4]
3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야 갈멜산의 결판을 낼 수 있었다. 둘을 만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중간 역할을 한 사람이 오바댜이다. 오바댜가 용기를 내어 목숨을 걸지 않았다면 갈멜산의 단판은 어려웠을 것이다. 오바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아는 사람이다. 엎드림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걸고 선지자 백 명을 돌보고 먹인 사람이다. 하나님은 교만의 때, 심판의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오바댜를 찾아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을 심판하신다. 왜 오바댜가 그 심판의 문을 여는 사람이 되었을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교만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다.
[이사야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두려움을 이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다. 오바댜는 엘리야와 아합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엘리야의 요청에 오바댜는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확장과 돌파의 때에 넘어야 할 마지막 장애물은 두려움이다. 왜 그런가? 원수의 실체를 알기에 머뭇거리게 된다.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위협이 있다. 오바댜를 통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영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깊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의 때 오바댜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부어 담판을 지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지금 하나님이 오바댜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찾아 악한 견고한 진을 꺾고, 하늘의 갑절의 축복이 부어질 문을 여실 것이라는 감동이 있다. 더 엎드리자.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나아가자. 두려움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자. 그리고 엎드리자. 갈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