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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een World 15. 결정적 순간을 뚫어 내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눈의 비늘이 벗겨지면)

20250202 Unseen world 1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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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17-18]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짧은 문장의 정의이지만 사실 깊은 의미가 있다. 거듭난 존재의 증명은 ‘주인’의 변화이다. 구원 받기 전까지 삶의 모든 중심이 ‘나’였다면 구원 받은 후에는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도전은 ‘자기 그물을 버리는 것’이다. 자기 그물을 버리는 그 순간이 ‘제자도’의 첫걸음이다. 제자도는 결국 ‘제자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길은 무엇인가? 방향성에 대한 문제이다. 제자도는 다른 말로 하면 ‘제자의 길’이다. 자기 그물을 버리는 첫걸음이 바로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마지막 걸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자도는 결국 ‘로드십’(주인 됨)에 대한 것이다. 베드로가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순간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가 젊어서는 자신이 원하는 곳을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그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그를 끌고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 19절에 베드로의 ‘주권을 의탁한 로드십’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예수님은 다시 분명하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처음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도, 그리고 본격적 사역을 앞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나를 따르라’에 대한 것이다.
[요한복음 21:18-19]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위에서 주목해야 말씀은 19절에 ‘베드로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 산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죽어야 영광이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얼마나 큰 역설인가? 이 세상의 모든 교육은 살아남고 버티고 경쟁해서 쟁취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이다. 바로 이 지점이 성도들이 서 있는 첨예한 지점이다. 성경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죽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현실에서 내가 죽는 것,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 신앙의 모든 갈등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즉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의 충돌 지점에서 생긴다.

2. 기록된 말씀

[신명기 6:6-7]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한다.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는 ‘인생’의 때를 묘사한 말씀이다. 앉았을 때부터 일어나고, 누워 있을 때까지 (아이에서 청년, 장년, 노년의 때) 말씀을 가르쳐 마음에 새기라고 말씀하신다. 가르치는 교육은 반복하는 것이다. 반복은 새기는 과정이다.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몸에 배는 것은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방 문화가 가득한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 몸에 배어 있게 하는 것이다. 몸에 배어 있어야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는다. 반복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된다.

3. 결정적인 순간을 관통하는 분별의 능력

결국 분별의 문제이다. 마지막 때는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되는 때이다. 문화와 환경은 ‘나의 뜻’을 강조한다. (바벨의 흐름이다-내 이름을 내자) 자기만의 사고방식이 선명해진다. 문제는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가?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의 모습이다. 사울은 어떤 존재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교회를 말살시키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는 율법에 능통하며, 당대 최고의 학벌과 집안 배경을 가진 지도자이다. 이런 사람이 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선두에 선 사람이 되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오늘 성경은 너무나 단순하게 대답을 준다. 그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운 말씀이다. 정말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 것이 없으니 분별하지 못한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이 하나님을 만나는 아주 중요한 장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사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사도행전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8절이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바로 이 상태가 사울의 상태이다. 눈은 떴으나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육의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뜨기는 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알아도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진리는 ‘앎’에 대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존재의 영역이다. 진리가 하나님이시기에 진리는 ‘보는 것, 만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식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오늘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보며 만나고 있는가? 아직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기독교 안에 있는 지식을 ‘앎과 깨달음’ 수준으로 폄하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내 뜻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뒤바뀐다. 이유는 분명하다. 볼 수 없는 눈 때문이다.

4. 눈을 뜨다

오늘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을 안수하신다.
[사도행전 9:17-18]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7절 =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말한다. “~예수께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신다”. 놀라운 말씀이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다시 보는 것이다. 오늘 사울이 잘못된 결정의 신념으로 움직인 것은 그의 눈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혼돈의 때이다.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18절 = 볼 수 있는 눈은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눈’이다. 사울의 눈에 비늘이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 오늘 말씀은 사울의 눈에 있는 비늘이 제거되었다고 기록한다.
우리의 눈을 가린 비늘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라. 교육, 경제, 문화, 사역, 가정, 일터에 있는 ‘비늘’이 무엇인가? 세상의 사고방식인가? 철학인가? 교육인가? 경험인가? 이 모든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성경 말고 부수적이고 참고 사항으로 여겨야 할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5. 오늘 나는 어디에?

오늘 나는 어디에 있는가? 17절을 보라. 예수님이 어디에서 사울을 만나시는가? “사울아,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이 말씀이 위로와 격려가 된다. 다른 길이 아니다. 사울이 걸어갔던 길은 예수를 죽이는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길 위로 오신다. 놀라운 말씀이다. 내가 가는 길이 실패하고, 어렵고,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길인데 예수님은 그 길 위로 오셔서 사울을 만나신다. 그리고 눈을 뜨게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대하시다. 오늘 우리의 실패의 길에서 낙망하지 말자. 예수님이 그 실패의 길 위로 오신다. 그리고 내 눈을 뜨게 하신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를 그 길 위에서 가르치신다. 그 뒤로 바울이 갔던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다. 기적의 길이다. 능력의 길이다.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분별한다. 다시는 잘못된 길로 가지 않는다. 실패의 길, 절망의 길, 죽음의 길을 바꾸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 기도하자. 우리의 눈을 뜨게 하소서! 내 눈을 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