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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ivation 1. 옛 자아와의 영향력과 열매와의 관계 (경작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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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구별된 특별한 장소 ‘에덴’에 두셨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기쁨은 무엇인가? 영의 기쁨이다. 기쁨의 단계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영의 기쁨(Joy) :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오는 기쁨(상황과 관계없이 지속적).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기쁨.
혼의 기쁨(Happiness) : 감정과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기쁨(감정과 생각에서 오는 기쁨이기 때문에 환경에 따라 변동이 있다).
육의 기쁨(Pleasure) : 육체적 감각에서 오는 기쁨(일시적이고 외적인 쾌락). 중독과 죄로 흐를 수 있다.
그래서 에덴 동산은 특별한 장소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에 두신 이유는 우연이 아니라 강력한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에덴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이다. 하나님과 깊은 친밀감과 교제가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에덴은 소중하다. 에덴에 있었던 사람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에덴을 경작하여 지키는 것’이다. 경작하는 것은 ‘날마다의 돌봄’을 의미한다. 에덴의 엄청난 자원은 경작을 통해 활성화된다. 반대로 경작을 멈추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비옥한 땅이 있어도 경작하여 개간하지 않으면 황무지와 다를 바가 없다.

2. 영의 활성화 원리

영은 사용할수록 강력해진다. 민감하고 예리해진다. 깊어진다. 소모되지 않는다. 혼과 육은 소모되는데 영은 그렇지 않다. 영은 소모되지 않는다. 반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무뎌지고 잃어버린다. 영은 소모됨이 없다. 영의 능력을 제한하고 무디게 하며 소모시키는 유일한 품목은 ‘죄’이다. 사탄의 레이더에 포착되는 순간은 ‘경작하지 않았을 때’이다. 약해져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말씀을 보지 않으면 생각이 죄에 노출되기 쉽다. 그러다가 죄의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 상황과 환경의 문제 같지만 결국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경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하나님은 환경과 상황 속에서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부르신다. 고난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의도를 빨리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친밀감의 장소, ‘하마콤-에덴’을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에덴

[고린도전서 15:45-47]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요, 마지막 아담이시다. 살려 주는 영이시며, 신령한 사람이시며, 하늘에서 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것은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회복된 아담에게 주어지는 것은 특별한 장소이다. 모든 복의 출처가 있는 풍성한 곳이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담에게 특별한 장소 에덴이 허락된다. 그 에덴은 ‘하나님 나라’와 같다. 하나님 나라에는 눈물이 없다. 슬픔도 없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풍성하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단순한 구원이 아니다. 완성된 구원이다. 완성된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이다. 진짜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 나라를 갈망한다. 하나님 나라보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4.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라는 표현은 헬라어 ‘바이아조’(biázō)에서 유래했으며, “강하게 밀고 들어가다”, “힘있게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과 갈망으로 적극적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가리킨다. 놀라운 결과이다. 인간의 갈망은 오직 ‘하나님 나라’를 남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가슴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만을 남게 하는 작업을 하신다.
‘바울’
[사도행전 28:30-31]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로 시작하고 하나님 나라로 마무리된다. 바울의 고백을 보자. 바울의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희로애락’이 있었는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모든 삶이 변화되었다. 변화된 바울의 변화된 삶의 결과는 ‘하나님 나라’이다. 놀랍다. 하나님 나라만 남는다. 그는 로마에 감금되어서도 하나님 나라를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5.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옛 자아의 영향력

그러면 단순한 질문에 이른다. 거듭난 사람이 에덴을 갈망하는 것이 가장 우선순위인 것처럼, 온전히 하나님 나라만을 갈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옛 자아의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옛 자아의 영향력을 온전히 부인하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갈망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제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십자가로부터 오는 진짜 능력을 받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옛 자아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한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옛 자아는 죽는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고백했다. 새롭게 된 두 번째 아담이 다시 사는 것이다. 그 순간 에덴에 허락된 모든 권세가 회복된다. 그 권세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래서 놀라운 삶을 살게 된다.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에덴을 지키고 경작하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6. 자기 신앙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신앙을 ‘수도원 신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명심하라. 신앙은 수도원적 자기 성찰을 넘어선다. 자기 성찰은 중요하지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자기 성찰이 아니다. 더 괜찮은 존재가 되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신앙을 ‘자아 성찰’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아 성찰은 종교적 신념에 가까울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자유와 기쁨’이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종교적 신념을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기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목적과 사명’이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목적과 사명이 있는 사람은 ‘개인의 자아 성찰로부터 오는 신념’을 넘어선다. 목적과 사명이 분명해질 때 사람은 자신을 넘어선 기쁨을 발견한다.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 살아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능력을 받아야 할 이유, 복을 받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갈망한다. 이 사람에게 생육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실제적 권세가 부어진다.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다.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재정의 복을 통해 굶주린 자를 먹이게 된다.

7. 명확한 비전을 가진 자의 경작

명확한 비전이 회복되어야 경작할 수 있다. 에덴을 경작해야 하는 이유는 에덴에 있는 복을 활성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갇혀 있는 사람은 에덴을 볼 수 없다. 명심하라. 에덴을 경작하여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명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북한이 보인다. 100! 500!이 보인다. 기도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된다. 작정 기도를 왜 하는가? 명확한 비전이 없으면 경작할 수 없다. 경작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밭을 경작하여 수확물을 얻는다. 그런데 그 수확물을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수확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비전과 사명을 모르게 하는 혼돈의 영을 제거해야 한다. 혼돈은 옛 자아로부터 온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신앙으로 경작해야 한다. 명확해야 한다. 분명해야 한다. 느헤미야 기도회는 바로 ‘나-개인 나무’에서 ‘동산’으로 확장되는 작정 기도이다.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다. 52일 동안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우리게 보여 주실 것이다. 목적 없는 작정 기도는 힘이 없다.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자.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인 비전으로 받아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