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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52일 기도회 D-14. 두려움의 해결! ‘인간의 이해’라는 장애물을 부활의 복음으로 넘어서라

20250420 느헤미야 기도회 D-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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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 나사로 사건

오늘 말씀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사건이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사건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같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절망이다. 나사로의 죽음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큰 슬픔이었다. 예수님도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5절). 그리고 실제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다(35절). 그런데 우리가 나사로의 사건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다.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제자들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6절). 보통 때 같으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이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왜 사랑하는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바로 움직이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이 모두에게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동일하게 말한다.
[요한복음 11:21,32]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2.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사람도 단숨에 달려가서 치유하시는 예수님이 정작 사랑하는 나사로가 어려울 때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소식을 듣고 계신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에 대해 눈여겨볼 장면은 나사로의 죽음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의 질문이다.
[요한복음 11: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그는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 슬피 우시는 모습을 보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고 반문한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나사로를 사랑했다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치유했다면 이런 슬픈 일이 왜 일어났겠는가?” 하는 질문이다. 예수님의 생각을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큰 도전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질문의 연속이다.
‘질문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다면 처음부터 미혹의 선악과를 만들지 마셔야 했다. 만약 선악과가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마귀의 미혹의 재료로 삼으셨는가?”
“하나님은 자식을 가질 수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주셨다. 그런데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정말 사랑하시는 것인가? 사랑은 테스트가 없는데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시는가?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고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버지 아브라함은 도대체 아들 이삭에게 어떤 인간인가?“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하나님을 거역할 수도 있게 하시는가? 자유 의지를 주지 않고 처음부터 순응하는 인간으로 만드셨다면 하나님도 좋고, 인간에게도 좋은 것 아닌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정의의 하나님이신가? 만약 그렇다면 이 땅의 불의를 왜 그냥 보고만 계시는가? 하나님은 전쟁, 기아, 질병, 자연재해로 죽어 가는 사람들의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말할 수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예배하는데 하나님은 왜 내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아픔을 주시는가? 그 고난과 아픔은 너무나 힘들다. 이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이해되지 않는 질문의 절정은 예수님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어떻게 인간의 구원을 위해 그토록 처참히 죽게 하실 수 있는가? 꼭 그 방법뿐인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단숨에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도 능력이 있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그토록 무능하고 무력하게 고통 속에서 죽게 하셔야만 했는가?”
나사로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질문이 이해가 된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이해되지 않는 ‘나사로’의 사건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도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그리고 어떤 사람의 질문처럼 “애초에 죽지 않도록 고치셨으면 이런 문제가 없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질문들이 있다.

3. 완벽한 대답

이해할 수 없는 나사로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과 대답은 선명하다. 놀라운 말씀이다.
[요한복음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에 대해 이미 답이 있으셨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중에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셨을 때 이미 4절에서 말씀하셨다.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받으시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대답의 시점이 중요하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질문하기도 전에, 어떤 사람이 독백의 질문을 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의 사건에 대한 답이 있으셨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미 대답하셨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다. 이 사실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해로 나아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질문의 연속일 뿐이다. 진리는 합리적 설명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믿음의 문제이다. 마리아, 마르다와 어떤 사람의 질문의 허점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합리적 경험과 이성과 논리’에 담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나사로와 같은 고통의 사건에서 언제나 자신의 합리적 이성을 사용해서 문제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이성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셨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와 상관없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실존하신다.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죽음은 죄의 영원한 형벌이다. 죄의 영원한 형벌에서 나오려면 인간에게 언도된 죄의 짐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앞으로 예수님이 하셔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드러낸 예언적 사건이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생명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가? 만약 인간이 생명의 문제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왜 이 시대에 인간의 죄악과 이기심으로 죽어 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가? 인간이 죽음을 이해한다면 절대 이런 시대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합리적, 논리적 이성은 불완전하다. 왜 아직도 자신의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보려고 하는가?

4. 살아서 나를 믿는 자

[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이해가 아니라 믿느냐는 것이다. 어떤 믿음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생각 박스에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이 말은 죽음에 대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그런데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놀라운 말씀이다. 내가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열린 하늘 문이 있다는 것이다. 열린 하늘 문으로 이해되지 않는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힘이 공급된다. 에스겔 37장의 죽음의 뼈로 가득한 사망의 골짜기에 불어온 생명의 바람이다. 부활절이다. 성도는 살아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의 실제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사로 사건’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야 한다. 나사로의 문제가 던져 내는 합리적 이성의 요구에 대한 질문 앞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님은 살아서 믿어야 할 분이시다”라고 이해를 넘어선 믿음의 선포를 해야 한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내 힘이 아닌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엄청난 영적 권세가 허락된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한 두려움에 다시 묶이지 않는다. 오늘 그 부활을 찬양하자. 열린 하늘 문을 선포하며 찬양하자. 마른 뼈가 살아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