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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 (Cultivation) 5 세상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하나님의 지름길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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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사용하시는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대로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다.
왜 이 질문이 중요한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을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사역의 첫 시작을 제자를 부르시는 일로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천하시며 남기신 것은 결국 세우신 제자들이었다. 교회는 보이는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교회에 참다운 제자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자기 성찰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사의 항목이 아니다. 영적인 의미가 있다. 결국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나타내실 때 납득되고 이해할 만큼 뚜렷한 청사진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뿌연 안개와 같이 주어진다.
(1) 아브라함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비전은 선명한 그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다.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알고 있지만 깊게 깨달아야 하는 영적 원리이다. 하나님의 뜻은 선명한 그림과 청사진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생각, 논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게 주어진다.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모른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갈지를 알지는 못했지만 장래에 유업으로 받을 땅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2)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앎이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다’고 말한다. 희미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희미할 때 힘들어한다. 어려워한다. 그런데 희미하다고 해서 진리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때에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명확히 볼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자신이 아는 것이 부분적이지만 결국은 주님이 자신을 아신 것같이 자신이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진리가 명확하고, 선명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게 말씀한다. 희미함으로 진리를 대한다고 말씀한다. 바울이 언급한 청동 거울은 사물을 희미하게 비춘다. 그러나 결국은 지금 우리가 보는 유리 거울처럼 선명하게 진리를 비출 것이다. 진리를 명확하고 선명하게 알게 되는 출발점이 희미함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3)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님의 말씀은 내가 가는 길을 비추는 빛이다. 그런데 이 빛은 전방 수백 미터를 비추는 빛이 아니다. 한 발을 뗄 수 있을 만큼만 비추는 등과 같다. 한 발 다음에 뭐가 있을지 알지 못한다. 오직 내가 내딛는 한 걸음만을 비추는 등이다. 그래서 답답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희미하게 하실까? 안개와 같이 뿌옇게 하실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다.

2. 연단과 훈련

하나님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희미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
(1) 인간은 죄인이다
죄인 된 인간은 언제나 명확한 계획과 설계도가 있음에도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이 죄의 본성이다.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그릇된 길을 가는 것이 죄의 정의이다. 실수해서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순간을 제대로 가기를 원하신다. 오히려 희미하고,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신다.
(2)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하신다
두 번째는 연단이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연단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연단을 통과한 제자의 첫 고백은 십자가에서 내 옛 자아가 죽었다는 고백이다. 그 고백보다 중요한 고백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광야로 부르신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분명하다. 그런데 내일 어디로 어떻게 갈지를 모른다.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어느 곳으로 어떻게 인도하심을 받아야 할지는 모르는 것이 연단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통해 철저히 ‘순종’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가장 중요한 신앙의 태도가 ‘순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전한 순종이란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은 상태를 말한다.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지 않을 때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반드시 연단하신다. 광야로 부르셔서 철저하게 옛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론을 묻는다. 그런데 사실 방법론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명확히 이해하고 안다고 해서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가?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절대적 방법은 아니다. 수많은 변수가 있다. 변수를 만드는 존재가 있다. 방해하는 존재인 사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설명보다 중요한 것은 스피릿이다’
제자는 설명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이 전수되는 것이다. 누가 진짜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제자는 머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제자에게는 그 스승의 스피릿이 묻어 있어야 한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말씀을 보라.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과 다르다. 하나님의 길은 내 길과 다르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인간의 생각보다 높다.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차원에 대한 이해는 설명이 아니다.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설명하는 사람은 설명하는 참모는 될 수 있지만 결정하는 리더는 될 수 없다’
조이풀교회는 결정할 수 있는 리더를 키워야 한다. 리더는 설명이 아니라 ‘영의 전수’로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순종함으로 발을 떼는 사람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아브라함처럼 발을 떼는 사람이다.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명확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그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조이풀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갈 것이다. 그 길이 승리의 길이고, 가장 빠른 길이다. 조이풀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고 분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리더로 일어나는 교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