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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 (Cultivation) 6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약함에 대한 사탄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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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 인간이 생각하는 약함과 성경이 말씀하는 약함은 다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주 분명하다. 인간은 연약하고,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만큼 강하다고 느끼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선악과 사건을 통한 사탄의 미혹은 인간이 하나님만큼 강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존재를 거절하게 하는 것이다.
(1) 인간이 말하는 연약함
약함에 대한 인간의 정의는 말 그대로 힘이 없는 연약함이다. 힘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이다. 이때 인간은 낙심하고 두려워한다. 낙심은 일어날 힘이 없는 마음 상태이다. 그래서 낙심 가운데 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몸에 힘이 없을 때 주먹을 쥐기도 어려운 것처럼 마음의 힘을 모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불이 붙을 수 없는 ‘젖은 장작’의 상태이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려고 해도 불이 잘 붙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불이 붙지 않는 상태이다. 그래서 인간은 연약한 상태를 두려워한다. 연약함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 방어 기제를 잘 사용한다. 방어 기제가 강한 사람은 결국 자기가 연약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겉모습이나 말투로는 강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2) 성경이 말씀하는 연약함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는 연약함은 다르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연약함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연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연약함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연약함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세 번 기도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나타내시는 놀라운 하늘의 비밀을 알게 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에서 자신의 약함에 대해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12:9-10]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9절 - 바울이 생각하는 능력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생각하는 강함의 능력과 다르다.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약한 데에서 온전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해 자랑한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 연약함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0절 -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와 같은 인간을 연약하게 하는 일들을 기뻐한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는 9절의 고백처럼 ‘자신이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2. 연약함에 대한 사탄의 거짓말

사탄은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뜻과 달리 거짓으로 정의한다. 사탄의 거짓말은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라는 것이다. 사탄의 목적은 선명하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뒤에 숨게 한다.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강하고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은 나같이 이런 연약한 인간을 사용하지 않으셔’라고 생각하게 한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라도 나는 강해져야 해. 내가 강해지면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실 거야’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의 조건을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는 스스로를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할 수 없어’라는 마음의 생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연약함과 상관없이 모세를 사용하셨다. 말씀을 보자.
[출애굽기 4:10-12]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0절 - 모세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말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고백한다.
11절, 12절 - 하나님은 모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리고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아주 놀라운 영적 원리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문제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내가 강하고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강함과 약함에 반응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왜 자신이 한없이 약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나를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생각은 단순히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아니다. 영적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판단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문제삼지 않으신다. 모세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문제삼는 것은 단 하나이다.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대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3. 혼적인 생각을 끊어 내라

혼적인 생각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생각이다. 사탄의 미혹에 오염된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을 피해 숨는다.
‘믿음의 사고 방식’
(1) 생각이 중요하다
말씀에 입각한 성경적 생각을 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적 사고 방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자녀가 축복 받기를 원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아버지가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겠는가?
탕자의 위대함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한 바닥을 보았음에도 아버지에게 돌아갈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탕자의 속사람은 건강하다.
탕자의 어두움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는 빛 앞으로 나아갔다. 건강한 생각이 아니면 어렵다. 그래서 생각을 지켜야 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영적인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않는 생각이다. 부정적인 생각, 인간의 힘에 기초한 연약한 생각을 거절하라. 그와 같은 생각은 사망의 생각, 육의 생각이다. 명심하라. 인간의 힘에 기초한 연약한 생각에 잠겨 있지 말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연민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연민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상황을 보고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상황에 자신을 비추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기 때문에 비교당하고 경쟁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믿음
믿음은 하나님이 내 간구를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을 분명하게 말씀한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다. 내 능력에 기초하면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두렵지 않다. 그 순간 두려움은 떠나간다.
(3) 꿈, 비전, 환상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 비전, 환상으로 가득하다. 다시 말하면 미래지향적 사람이다. 이 사람의 눈은 언제나 미래에 가 있다. 그래서 항상 비전과 꿈을 바라본다. 비전과 꿈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지난주 하나님의 비전이 뿌연 안개처럼 온다고 했다. 맞다. 비전의 사람은 무엇이지는 모르지만, 안개 뒤에 실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언제나 미래를 바라본다.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바라본 것을 이룬다. 누가 미국에 갈 수 있을까? 미국에 가겠다고 바라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가든지, 배를 타고 가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간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날에 꿈, 비전, 환상을 강조한다.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예언과 꿈과 환상이다. 바로 이 말씀이 혼돈의 말세를 이길 수 있는 강력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라보라고 말씀하신다. 바라보자. 기대하자. 절대 부정적인 생각하지 말고, 연약함에 빠지지 말고 바라보자.
(4) 말의 선포
가장 중요한 일은 이 모든 것을 입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12: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입으로 나오는 말이 내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입으로 뱉어낸 말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편 말씀을 보라. 낙담된 순간에 시편은 영적으로 선포하라고 말씀한다.
[시편 42:11]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Why are you downcast, O my soul? Why so disturbed within me?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yet praise him, my Savior and my God.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영적인 사람은 그 사람의 영에게 선포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명령한다.
가장 높은 차원인 영적인 차원에 선포하는 이유는 높은 차원이 낮은 차원의 혼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원리를 안다. 바로 그때 불안한 마음에 평강이 온다. 기쁨이 온다.
시편 말씀의 선포를 보라.
[시편 103:1-5]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영으로 하여금 송축하라고 명한다. 바로 그 순간 죄악을 사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고, 나를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할렐루야! 선포의 힘이다.
[시편 43:5]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날마다 영에게 선포하라. 이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믿는 사람이다. 그때 영적인 세계가 완전히 열리고, 우리 안에 보이지 않는 그 영적인 차원이 실상과 현실이 될 것이다. 이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난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문제삼지 않으신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