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6:13-15 개역한글]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1. 무너짐 속에서의 레슨 - 제대로 믿어야 한다
지난주에 다윗의 예배를 보았다. 다윗은 빼앗겼던 법궤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옮기어 갈 때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절대 손을 대지 말아야 하는 법궤에 손을 댄 웃사가 죽는 사건을 경험했다.
이 사건으로 다윗이 알게 된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예배를 받으실 분이 하나님이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이 말은 제대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3만 명이나 되는 성대한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법궤를 말씀대로 옮기지 않았다. 편하게 수레에 옮겨 운반하게 했다.
웃사의 사건을 통해 다윗의 예배가 성대하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억하자. 예배는 제대로 드려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 중심의 진정한 예배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편안함’이다.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임에도 모든 예배가 인간의 편안함에 맞추어져 있다.
모든 예배가 인간의 ‘효능감’에 맞추어져 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효능감’이다. 어떤 일이든 ‘효능’을 중요시한다. 효능이 없는 일은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그 효능이 누구를 위한 효능인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때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옮겨야 하는지 몰랐을까?
[역대상 15:2, 개역 한글]
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역대상 15:14-15, 개역 한글]
14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케 하고
1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분명 말씀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만이 궤를 메고 운반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궤를 운반하는 레위인들은 몸을 성결하게 해야 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에 기록된 명령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만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방법과 생각이 우선시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그 삶에 중심으로 서 있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영적인 차원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교만’이다.
교만의 뿌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떠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경외함에 대한 ‘얕음’이다.
얕음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의 ‘교만’이다.
교만은 결국 내 방법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은 결국 자기 멋대로 선악과를 먹고 만다. 그래서 교만이다.
2. 진짜 예배는 타락한 자아가 죽어야 한다 - 정직함
왜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예루살렘의 예배를 여시기 전에 웃사 사건을 주셨는가?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셔서이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타락한 본성을 흔드신 것이다.
다윗은 삼 개월 간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내면의 자아를 직면해야 했다.
옛 본성의 자아를 직면하는 순간은 아프다. 힘들다.
터널과 같은 시간이다. 닫힌 하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바닥의 시간을 지나게 하신다.
삼 개월의 터널의 시간을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보냈음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다시 하늘의 문을 여신다. 은총의 문을 열어 주신다.
오벧에돔의 예배로 다시 은총의 문이 열렸다.
다윗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윗의 성정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은총의 문을 다시 여신 이유는 하나이다.
그는 정직했다. 아프고 힘들지만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드러내신 하나님 앞에 정직했다.
[시편 51:9-10, 개역 한글]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밧세바의 범죄가 드러났을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갔다.
왜 정직한 영을 구했을까?
타락한 옛 자아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거짓 이유를 만들어 낸다.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다윗은 영적인 사람이다. 영의 원리를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했다.
정직함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다.
정직한 영이 부어질 때 정한 마음이 창조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그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옛 자아의 영향력이 끊어지는 놀라운 순간이다.
다윗은 바닥의 삼 개월 동안 어렵지만 정직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오벧에돔을 통해 다윗에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문을 열어 주셨다.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복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영이 기뻐한다.
[사무엘하 6:12, 개역 한글]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하나님의 궤를 즐겨 메기를 기뻐하지 않았던 다윗의 마음이 기쁨으로 회복된다.
죽음의 시간을 통과한 다윗에게 은총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하나님은 다윗을 다시 새롭게 하셨다. 다윗의 마음을 다시 회복시키셨다.
다윗의 새로움은 ‘변화‘로 나타난다.
변화는 이전과 다른 새로움이다. 무엇이 변화되었는가?
3. 제대로 예배를 드리다 - 여섯 걸음의 예배, 다른 차원의 예배가 열리다
[사무엘하 6:13-15, 개역 한글]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14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다윗은 오벧에돔의 집에서 전과 달리 말씀대로 레위인을 통해 언약궤를 운반한다.
놀라운 장면이 여기에 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고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린다.
‘여섯 걸음에 대한 해석’
여섯 걸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단회적 사건 - 처음 여섯 걸음만 - 새 출발의 성결 의식.
연속적 사건 - 매 여섯 걸음마다 제사를 드렸음.
단회적, 연속적 해석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다윗이 이전의 예배와 달리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것이다.
여섯 걸음은 인간의 불완전하고 연약한 걸음을 말한다. 여섯 걸음 후의 일곱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온전한 마음의 회복이다.
희생의 마음을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 진정한 예배의 회복이다.
(1) 제대로 된 예배의 회복이 우리의 삶에 진짜 기쁨과 행복을 준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온전한 회복과 기쁨과 행복이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제대로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예배해야 한다. 제대로 예배할 때 다윗이 춤을 추며 나아갈 정도로 진짜 기쁨이 회복되었다.
다윗의 춤은 왕의 춤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춤이다. 자유의 춤이다. 진짜 춤이다.
제대로 예배해야 한다. 제대로 예배하기로 결정하면 기쁨이 회복된다.
(2) 언약궤를 메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이라는 정점의 예배가 누구에게 열리는가?
궤를 메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조이풀 안에 예루살렘의 예배가 열리기를 원하는가? 궤를 짊어지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예배는 그냥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궤를 메는 수고가 모여 온전한 예배가 된다.
조이풀의 예배가 예루살렘의 예배의 영광을 맛보려면 예배를 향한 수고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해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그냥 아무 준비 없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예배는 같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