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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회복 8 광야 한복판에서 열리는 승리의 (광야로 보내시는 이유)

예배 회복 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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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2, 개역한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태복음 4:1, 개역한글]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1. 하나님의 준비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광야는 고통과 고난의 장소 같지만, 성경에서의 광야는 준비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실 때 합당한 사람을 찾으시고, 준비시키신다.
(1) 갈망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에게는 ‘갈망’이 있다. 세상적인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 중심은 갈망을 말한다. 영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갈망’이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갈망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시는가? 선포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갈망이 있는 사람이다.
(2) 준비와 연단
하나님은 갈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드신다. 그릇의 용도는 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준비된 그릇에 담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로 보내신다. 광야는 준비의 장소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준비시키시는가? 하나님의 준비는 온전히 하나님만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준비 됨은 ‘결정의 과정’에서 판명된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곤란한 상황 속에서 결국 ‘자기 결정’으로 불순종한다.
자기 결정의 영적인 의미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로드십’(주인 됨)에 있다.
로드십은 ‘주인 됨‘에 대한 문제이다.
누가 주인인가에 대한 주인 됨의 문제는 난처하고 곤란한 상황 속에서 분명해진다.
주인 됨의 문제는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주인 됨‘에 대한 문제이다.
주인 됨의 문제는 인간의 욕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는 결국 주인 됨의 문제에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보다 욕망의 소리를 들었다. 결국 마귀의 미혹에 걸려 넘어진다.
욕망은 숨겨져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머리를 든다.
사탄은 머리를 추켜올린 욕망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능숙한 사냥꾼처럼 정확히 포획한다.
마귀의 미혹은 단순하고 명확했다.
하나님 말고 아담 네 자신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욕망에 기초한 죄인 된 인간의 형상을 보여 준다.
(3) 광야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인간의 힘이 제로가 되는 광야로 보내시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인간의 욕망은 ‘생존‘에 기초한 본능적 욕망이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욕망이다.
세상과 단절된 광야라는 공간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헛된 욕망‘을 차단시키는 공간적 힘이 있다.
세상과 차단된 공간에서 ‘인간’은 오늘을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만을 염려한다.
인간은 생존과 연결된 광야라는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체를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어떤 것으로도 포장하지 않은 벌거벗은 ‘아담’의 모습이 바로 광야에서의 인간이다.
아담의 벌거벗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순수함 그 자체로의 인간이다.
팔복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마음이 깨끗하고 청결한 사람이다. 어떤 의도도 섞이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인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뜻이 100% 여과없이 투영된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광야는 ‘벌거벗음’이다.
벌거벗은 아담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했던 것처럼 인간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가장 선명하게 듣는다.
그래서 광야의 뜻은 ‘말씀’이다. 미드바르(מִדְבָּר, midbār).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광야‘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약속의 성취를 위한 ‘준비’에 있다. ‘나’라는 존재는 광야에서 비로소 준비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고 순종하고 따를 준비가 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움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광야에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제자가 된다.

2. 광야는 준비와 연단을 넘어 승리이다

[마가복음 1:12, 개역한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마태복음 4:1, 개역한글]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광야로 가셨다.
예수님이 광야로 가신 이유가 분명하다.
(1) 광야는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보내신다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마가복음 1장 12절에는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령에 이끌리셨다’는 마태복음 4장 1절의 기록과 차이가 있다.
원문의 뜻을 보면 ‘몰아내셨다’라는 뜻은 ‘인도한’ 정도가 아니라 강제적인 힘으로 강하게 몰아낸 것을 말한다.
같은 헬라어의 사용 용도를 보면 ‘귀신을 쫓아내다‘(막 1:34,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와 같다.
성령이 강제적으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신 것이다.
광야는 내가 가는 곳이 아니다. 광야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놀라운 진리이다. 마귀의 엄청난 거짓은 내 어떠함 때문에 ‘광야’가 선택되어졌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의 상태에만 집중한다.
내 힘으로 광야를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친다. 바로 이 모습이 주인 됨을 포기 못한 죄인 된 인간의 실체이다.
아니다. 광야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만 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며 구별된 선택의 장소이다.
오늘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성령님은 나를 반드시 광야로 이끌어 가신다.
광야는 어려운 장소이다. 인간이신 예수님께도 광야는 어려운 장소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셨다)
이런 어려움에도 예수님이 광야로 가신 이유는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일어나는 광야와 같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과 환경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님이 나를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렇게 믿는 성도에게 광야는 고난의 장소가 아니라 특별한 장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선명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2) 광야는 연단의 장소를 넘어선 승리의 장소이다
예수님이 광야로 가신 이유는 분명하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다.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사탄의 시험은 굶주린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시험이다.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린다면 하나님의 사자가 너를 보호하여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시 91편)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심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시험이다. 또 하나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기적을 행함으로 다치지 않는 인간의 자기 자랑과 과시에 대한 시험이다.
마지막으로 네가 나를 경배한다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은 하나님 없는 인간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는 가장 강력한 시험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시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신명기)으로 이기셨다.
[마태복음 4:4, 개역한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태복음 4:7, 개역한글]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태복음 4:10, 개역한글]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어떤 초월적 능력으로 사탄을 이기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다. 이는 철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이기신 놀라운 승리이다.
놀라운 사실이 여기에 있다.
광야는 연단의 장소를 넘어 예수님의 승리가 있는 곳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승리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다.
그래서 광야는 연단을 넘어서 승리이다.
오늘 우리에게 광야와 같은 상황이 있는가?
그곳에 놀라운 ‘승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승리는 중요하다. 광야는 예수님의 승리가 있는 곳이다.
광야로 가야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오늘 내가 처한 광야는 결국 승리가 되어 내게 주어질 것이다.
광야의 터널을 통과했다는 것은 단순히 연단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승리가 주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3) 원수의 목전에서
[시편 23:4-5, 개역한글]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광야를 지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상황이다.
빛보다는 어두움이, 평안보다는 두려움이, 생명보다는 사망의 힘이 내게 더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모든 것을 동원하여 다윗을 이기려고 하고, 예수님을 이기려고 하고, 나를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광야로 간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강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결국 광야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5절에 보면 광야를 통과한 다윗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이 베풀어지고, 기름 부음이 주어지고, 그의 잔이 넘치는 잔치가 열린다.
모든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다윗에게, 출애굽을 넘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은 왕의 승리이다.
대적할 원수가 없을 정도의 강력한 왕의 승리이다. 오늘 그와 같은 승리의 만찬이 주어지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광야는 승리이다. 광야의 승리를 취하자.
오늘 광야에서 승리의 문이 열린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