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22, 개역한글]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1. 개척자 아브라함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언약이 실제가 되는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다.
개척자, 아브라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세기 17: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창세기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 자손이 민족과 나라가 될 것이라고 언약하셨다. 놀라운 축복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복은 당대에 한정된 복이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확장되는 복이다.
아브라함은 개척자와 같다. 개척자는 땅을 파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와 같은 땅을 기경하여 씨를 뿌리는 사람이다. 개척자는 비전의 사람이다.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수확물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개척자는 믿음의 사람이기도 하다.
개척자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많은 어려움이 있다. 희생이 있다. 열매를 위한 ‘대가 지불’이 있다.
아브라함 시대의 복의 상징은 ‘우물’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우물(well)은 생명과 생존의 상징이자, 영토와 주권의 표시이다.
그래서 ‘우물’을 중심으로 많은 분쟁이 있다. 우물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가축을 먹일 수 있다.
우물은 땅을 파서 샘의 근원을 찾는 일이다. 물은 생명의 상징이다. 우물이 있어야 정착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개척 신앙은 어렵다. 아브라함과 같이 땅을 파는 수고가 있다.
길이 없는 곳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은 수고가 따르지만, 한 번 만들어진 길 때문에 다음에 오는 사람들의 여정은 쉽고 편하다.
개척 신앙은 어렵다. 황무지와 같은 땅을 개간하여 샘의 근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희생의 수고가 있다.
그래서 개척자들은 끈기가 있다. 모험심이 있다. 도전 정신이 있다. 이루어 내고자 하는 목적이 선명한 사람들이다.
신앙의 대를 이어 가는 가문은 아브라함과 같은 개척자가 있었고, 그를 통한 대가 지불과 희생의 수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를 통해 예수 우물, 복음 우물, 생명의 우물을 얻게 된 사실을 알아야 한다.
2.이삭의 시대
창세기 26장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다.
이삭의 시대는 아브라함의 시대와 다르다.
이삭은 우물을 파는 세대가 아니다.
이삭은 아브라함과 같은 개척자의 세대가 아니다.
이삭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판 우물을 지키는 것이고, 블레셋에 의해 막혔던 우물을 다시 파는 세대임을 명심하라.
이삭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다시 판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1) 이삭의 은총
아브라함과 이삭은 다르다. 그 말은 아브라함의 소명이 다르고, 이삭의 소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개척자의 소명이다. 황무지와 같은 땅에 우물을 파는 세대이다.
이삭은 다시 우물을 팔 필요가 없다. 파진 우물을 물려받은 ‘은총’의 세대이다.
은총은 내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복을 말한다.
주어진 복이라는 것은 이미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이삭이 해야 할 일이 우물을 다시 새롭게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우물을 파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창세기 26: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말씀을 보라.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고 기록한다. 이삭의 우물이 아니다. 분명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아브라함의 우물을 막았던 블레셋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사탄과 같은 존재이다. 사탄은 질투하는 자이다. 블레셋이 왜 아브라함의 우물을 막았겠는가? 아브라함이 받았던 하나님의 실제적 복 때문이다.
질투는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을 파괴하는 죽음의 영성이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다. 우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누가 우물을 팠느냐가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우물을 팠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다. 그 말은 다른 존재가 물리적 우물을 팠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의 복은 우물 자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우물이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질투‘ - 오를 수 없는 한계
사탄은 하나님의 복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질투한다. 그래서 우물을 막는 것이다.
질투는 오를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사탄은 그래서 하나님을 질투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오를 수 없는 절대 존재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래서 인간을 질투한다. 인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복과 사랑을 절대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는 비교 의식과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질투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는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과 위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
’이삭의 은총‘
이삭은 ‘질투’의 대상이었다.
[창세기 26: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세기 26:15]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블레셋은 이삭이 받은 은총을 시기했다. 그들의 질투의 이유는 분명하다.
무슨 수를 써도 이삭이 받은 은총의 복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삭을 질투한 이유가 분명하다.
(2) 환난과 기근의 때에 복을 받았다
[창세기 26: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창세기 26:12-13]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이삭은 흉년의 때에 백 백의 복을 얻었다. 이삭은 두 배, 세 배와 같은 갑절의 복이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백 배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13절에 보면 이삭은 창대했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성경은 이삭이 이 모든 복을 능력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영적인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14절에 블레셋이 왜 질투했는지, 15절에 그들이 왜 아브라함의 우물을 막고 흙으로 다시 메웠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이삭이 은총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3)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복
성경은 이삭에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여정이 있었다고 소개하지 않는다. 야곱과 같이 전투적으로 침노하여 하나님의 복을 씨름하여 찾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창세기 26장에 보여지는 이삭은 심히 유약한 자이다. 이삭은 그랄 지역에 머무를 때 아름다운 아내 리브가 때문에 자신이 죽을까 봐 리브가를 누나라고 속인 유약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는 이삭은 남자로, 가장으로, 리더로서의 자격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다.
[창세기 26:7]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복을 받는다. 어느 날,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을 통해 이삭이 리브가와 껴안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이삭을 불러 왜 속였냐고 묻는다. 이삭은 솔직히 자신이 죽게 될까 봐 속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비멜렉이 볼 때 한심한 이삭이 틀림 없다. 이런 이삭을 보며 아비멜렉은 이삭과 리브가를 범하는 자는 죽게 될 것이라며 이삭과 리브가를 보호한다(11절).
왕의 보호이다. 이삭이 아비멜렉에게 특별한 공을 세운 일이 없다. 이삭의 탁월함 때문도 아니다. 그런데 왕의 보호를 받는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삭의 복을 해석할 수 있는가? 흉년 때 백 배의 복을 받는 이삭을 해석할 수 있는가?
답은 하나이다. 이삭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총 때문이다.
3. 흉년을 이기는 이삭의 복
이삭이 흉년의 때, 원수 블레셋 앞에서 복을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아버지의 우물을 파다
이삭의 위대함은 자신의 우물을 파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성공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삭은 우물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우물이다.
오늘 흉년의 때를 이길 수 있는 이삭의 복의 비결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순종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가장 강력한 반역은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바벨탑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했다. 주인공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수고하여 땅을 파고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탑을 세웠지만 헛고생이다.
오늘 흉년의 때, 기근의 때, 원수의 힘이 강력해지는 이 시대를 이길 영성은 이삭처럼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는 순종하는 아들의 영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2)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
이삭의 은총은 투쟁과 쟁취로부터 오지 않는다. 이삭은 분쟁을 피한 사람이다. 이삭은 다툼이 없었던 사람이다.
놀라운 사실이다. 이삭의 우물을 두고 이삭의 종들과 그랄 지역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삭이 우물로 인한 다툼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2절에 보면 자신이 옮겨 갔다.
[창세기 26: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놀라운 말씀이다. 그는 다툼의 장소에서 떠나 다른 우물을 팠다. 그 때문에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고,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하였다.
‘르호봇’은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이다.
이삭이 받았던 백 배의 복, 거부가 된 복의 비결이 여기에 있다. ’르호봇‘이다. 이삭은 팔복의 화평하게 하는 자이다. 누가 화평하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화평하게 할 수 있다. 화평은 세상의 개념과 다르다. 세상은 조건이 맞는 윈윈 전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화평은 내가 죽어야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평화의 왕이신 것이다.
이삭은 유약한 사람 같지만 누구보다 성숙하고 강한 사람이다. 희생과 겸손과 양보는 강한 자, 성숙한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투쟁의 시대이다. 자기 것만 옳다고 말하는 경쟁과 분쟁과 전쟁의 시대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시대이다. 분쟁의 시대에 이삭의 영성이 필요하다. 르호봇의 영성을 가진 이삭에게 하나님은 전대미문의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신다.
이삭은 어떻게 보면 유약한 인간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 준다. 그분의 삶은 섬김과 양보와 희생으로 가득하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평화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삭을 조명하라. 이삭의 영성을 구하라. 흉년의 때를 이길 수 있는 하늘의 복이 이삭에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