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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 (Cultivation) 13 절망은 새로운 것을 일으키겠다는 하나님의 신호! (새로운 관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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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20-23]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1. 새로움의 정의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움은 ‘발전’된 새로움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 존재의 새로움이다. 기존 틀로 담아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새 가죽 부대로 설명한다. 새 술을 헌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다. 헌 가죽 부대가 찢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에서의 새로움은 언제나 존재적이다.
창기가 신부가 되고, 고아가 아들이 되고, 죄인이 의인이 되는 존재적 새로움이다.
창기와 신부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르다.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
고아나 아들이나 외형은 똑같아 보여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생각 구조와 마음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새로움은 질서와 법칙이 새롭게 적용된 상태를 말한다.
혼적이고 육적인 사람이 변화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질서가 생겨났음을 말한다.
변화 받기 전에는 혼적이고 육적인 옛 자아의 생각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변화 후에는 당연하던 육과 혼의 생각이 걸림돌이 된다. 그 이유는 성령의 법의 질서 아래에 정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함을 말한다. 새것이 된 상태를 말한다.
헌것이 아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피조물이다.
변화는 한 번에 이루어진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새롭게 태어난 피조물은 피조물을 담고 있는 공간의 질서에 순응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움’에 대한 선포이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는 진리를 날마다 선포해야 한다.

2. 절망 속에서의 새로움

새로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적 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요’이다.
필요는 언제나 ‘필요를 위한 공간’을 만든다.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재정이다. 그 필요가 ‘재정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사업적 전략, 방법, 계획 등)
필요를 다른 말로 하면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 속에 있는 사람은 해결을 위한 필요를 느낀다.
그 필요가 ‘해결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두 종류의 필요’
(1)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본능(예언적인 사람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정의해 본다면 인간의 힘이나, 지식, 경험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미래를 분석해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적 능력은 ‘본능’에 가깝다.
엄마가 되는 순간 생겨나는 자녀 보호를 위한 본능이 있다.
그것은 위험한 순간을 컴퓨터가 인식해 분석함으로써 위험 신호를 주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다가올 위험을 아는 것이다. 설명할 수 없다. 엄마라는 존재적 이유 말고는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을 설명할 수 없다.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본능이다.
베드로는 반응이 빠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사도들의 리더로 세우신 것이다. 베드로이기 때문에 보자기 환상에 빠르게 반응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베드로처럼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빠른 반응이 그를 이방인 고넬료에게로 이끌었다. 그곳에 성령이 내림으로써 이방 선교의 문이 빠르게 열렸다.
리더는 비저너리이다. 비저너리는 보는 사람이다. 필요에 민감한 사람들이 비저너리가 된다.
똑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능력이 비전이다. 리더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필요에 민감하다.
필요에 민감함이 비전이 된다. 미래를 위해서는 필요에 민감한 리더들이 일어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2) 상황으로부터 오는 본능
첫 번째가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본능이라면 두 번째는 상황으로부터 오는 본능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언제 새로운 것이 일어나겠는가? 기존의 방법이 먹히지 않을 때이다. 방법이 없을 때이다.
현실의 문제에 대해 방법이 없는 상황을 ‘절망’이라고 한다.
절망은 최악의 상황 같지만, 인간이 상황적으로 절망의 상태에 있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에 대한 본능이 움직인다.
예를 들면 율법은 인간의 행동을 절망의 코너로 몰고 간다.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율법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진다. 바로 그 절망의 무너짐 속에서 인간에게 ‘은혜’라는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가 ‘바닥의 절망’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다. 육신의 질병, 내면의 문제, 재정, 관계, 귀신 들림까지, 모두가 상황의 절박함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다.
절망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절망’이라는 바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간절한 필요가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힘’을 얻게 했다.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바닥의 절망에서 진짜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발적으로 나아간다. 내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결국 어느 순간 그 바닥을 드러낸다.
은혜를 붙잡고 있다는 것은 ‘절망’의 순간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이 지옥에 가야 될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를 잊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애가의 말씀을 보자.
배경은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함락된 BC 6세기 초의 참혹한 상황이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성전을 파괴한다. 그 후 유다 백성들이 겪은 절박한 고난과 절망을 기록하고 있다.
3장 1절에서 20절까지 예레미야가 처한 상황을 보자. 도시의 무너짐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었다. 상황적으로 절망에 있다. 이런 절망의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새로움’을 선포한다.
[예레미야애가 3:20-23]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0절은 절망의 상황을 낙심으로 표현한다.
21절에 놀라운 고백은 낙심된 상황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낙심이 소망이 되었다는 역설적 고백을 한다. 낙심과 절망 속에 있지만 예레미야는 다른 눈이 있었다.
절망의 상황을 분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2절에 그는 진멸 당할 것같이 힘들지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 믿음의 고백이 23절의 고백을 만든다.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주의 성실이 큽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예레미야를 돌파하게 한 힘은 ‘새로움’이다. 예레미야가 고백한 아침은 시작이다.
전혀 다른 차원의 시작을 새로움으로 선포한다.
아침에 선포하는 새로움의 선포가 미래의 현실이 된다.
(3) 인간의 본능적 악함
인간의 본능적 악함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방법을 의지할 때 드러난다.
홍수 재앙의 절망을 겪은 인간이 내놓은 대안은, 물에 잠기지 않기 위해 바벨탑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보여 준다.
내 절망이 결국 내 방법과 힘을 의지하다 야기된 것이라는 (불순종으로) 영적인 이유를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이럴수록 고통은 더 지속될 뿐이다.

3. 새로움으로부터 오는 힘을 얻으려면

(1) 항복해야 한다
절망의 코너 속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해야 한다.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한다.
명심하라. 완전한 항복이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움의 능력을 입을 수 있다.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언적으로 살아야 한다
예언적으로 산다는 것은 순응하는 것이다. 즉각 반응해 순응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문’이 열린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지 못해 낙담되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해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을 때 고기를 가득 잡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전 방법을 고지식하게 고수하고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발을 떼는 아브라함이 즉각 순종할 때 축복의 길이 열린다.
절망이 깊어 간다. 예전 방법과 생각으로 분석하고 예측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빨리 인정해야 한다.
옛 영광에 사로잡혀 있지 말아야 한다.
기대함으로 즉각 순종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