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1. 자유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이다.
자유는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자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가치이다.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선악과’는 인간이 자유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인간에게 있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그래서 소중하다.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가 동물의 자기 본능과 다른 것은 ‘책임’이다.
인간의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함께한다.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기로 선택했다.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단절이고, 인간이 죄인이 되고 육신이 된 것이다.
인간은 그때부터 ‘묶임’의 존재가 되었다. 상황과 환경을 다스리지 못하고 묶이는 존재가 되었다.
‘두려움의 원인 - 묶임, 죄의 사슬’
인간은 영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죄의 노예가 되었다.
[로마서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요한복음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의 문제는 단순한 행동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씀을 보면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종이라는 것은 자유가 없는 상태이다.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이다. 묶임의 상태이다.
죄인은 죄의 사슬에 묶여 있다. 묶임의 뿌리는 ‘두려움’이다.
자유한 상태인 것 같지만 사슬의 범위 안에서일 뿐이다.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이 언제나 나를 옥죄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인간의 궁극적 묶임은 상황과 환경이 아니다. 결국 마음의 묶임이다.
두려움은 마음이 묶여 있는 상태이다. 이런 마음의 두려움은 ‘트라우마’로 남아 영향을 준다.
트라우마(Trauma)란
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 기억과 감정이 해결되지 못한 채 마음과 몸에 남아 현재의 삶과 반응을 계속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에도 영향을 주며, 의지와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작동한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고통이 끝나지 않고 현재에 계속 살아 있는 상태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트라우마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묶임’의 한 형태이다.
트라우마란 해결되지 않은 고통의 기억이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음에 고착되어 사람을 묶어 두는 상태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본 트라우마의 특징’
(1) 현실이 아니라 비현실 속에 가둔다
트라우마는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과거의 영향력은 현재의 시점으로 볼 때 과거일 뿐이다.
오늘 내가 맞이하는 현실과 미래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트라우마는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현실을 지배하는 과거의 영향력이다. 또 그 일이 반복될 것 같은 두려움이 트라우마의 비현실이다.
(2) 불신의 상태로 만든다
트라우마의 영향력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없다. 두려움은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다.
영적으로 보면 트라우마의 강력한 영향력은 하나님이 없는 ‘부재감’이다.
부재감이 지속되면 딱딱하게 굳은살이 된다. 이 상태가 불신의 상태이다.
불신의 상태는 단순히 믿음이 약해진 상태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절하고 있는 상태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새 영과 새 마음이 오려면 ‘굳은 마음’을 제거해야 한다. 딱딱하게 굳은살을 제거해야 부드러운 속살을 얻을 수 있는 원리와 같다.
노력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원인은 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기 때문이다.
2. 다윗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묶임에서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성도에게 있어 자유함이 중요한 이유는 자유가 예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이다.
그래서 자유는 중요하다.
다윗의 자유함은 예배 가운데 나타난다.
[사무엘하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사무엘하 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구약의 패러다임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새 언약의 예배를 이미 드렸기 때문이다.
다윗의 예배는 율법의 예배가 아니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뛰놀겠다고 말한 사람이다.
현대 예배에서는 ‘여호와 앞에서 뛰놀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지만 다윗의 시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뛰놀다’의 뜻은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묘사한 순수하고 맑은 상태’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물들지 않았다’, ‘오염되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예배는 ‘맑은 예배’였다. 그 말은 그의 영이 ‘맑고 순수함’의 상태라는 것이다.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상태이다. 마음의 트라우마로 인한 딱딱하게 ‘굳은살’이 없다.
(1) 다윗은 사람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무너졌다
다윗의 삶을 보면 사람에게서 온 어떤 묶임도 없다.
[사무엘상 24:5-6]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사울이라는 존재는 다윗에게 있어 ‘묶임과 트라우마’일 수 있다.
트라우마는 한 번의 사건으로 생기지 않는다. 묶임이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 속에 해결되지 않을 때 트라우마가 된다.
다윗은 사울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힘으로 죽일 수 있었다. 사실 다윗도 얼마나 사울을 제거하고 싶었겠는가?
이 말씀은 다윗이 사울을 제거할 수 있었음에도 그의 옷자락만 벤 사건이다. 사울을 제거한 것도 아니고 그의 옷자락만을 베었음에도 다윗의 마음이 찔렸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그 이유는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윗의 비밀이 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다윗은 사람이나 사건 앞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의 무너짐은 사람 앞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도 묶이지 않고 자유할 수 있었다.
‘밧세바 사건’
[사무엘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밧세바 사건은 다윗에게 있어 평생의 묶임과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자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윗은 나단의 책망에 “내가 여호와께 범죄했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고백을 들으시고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다.
범죄한 사울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나중에 사울은 무당에게까지 가서 자신의 묶임을 풀어보려고 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다윗이라는 사람 앞에 무너졌고, 블레셋이라는 환경에 무너졌고, 자신의 왕권이라는 권력 앞에 무너졌다. 그래서 사울의 삶은 언제나 다윗에게 묶여 있었다. 사람들이 다윗을 자신보다 더 칭송한 그 순간부터 사울의 모든 삶은 묶임이며, 다윗은 그에게 트라우마였다.
(2) 사람 앞에 무너지면 상처가 되고 굳은살이 된다
사람 앞에 무너진 사람은 그와 같은 상황이 오면 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인간의 해결 방법으로 상황을 피해 보려고 한 사람은 결국 그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반드시 그 상황은 내게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또다시 나를 두려움으로 묶는다.
굳어질 때 나타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말이나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내면에 안정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스스로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알면서도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3) 예수님
예수님을 묶으려고 한 인류 전체의 죄악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사람에게 묶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기도에서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셨다. 아파하고 괴로워하셨다.
그 결과 예수님은 사람에게 묶이지 않으셨다.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 사명을 감당하셨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사람 앞에 무너지지 않아야 자유할 수 있다. 하나님 앞으로 가라. 하나님 앞에서 무너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면 하늘 문이 열린다. 위로부터 자유함이 부어진다. 능력이 부어진다. 하나님 앞으로 가서 무너지자. 백 번, 천 번이라도 무너지자. 그 무너짐 속에 위로가 있다. 해결이 있다. 자유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