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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하심 6 (신명기 강해) 하나님이 거절하신다고 느껴질 때(끝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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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3:23-27] 23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4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1. 하나님의 거절(막아섬)

신명기 3장에서 눈여겨볼 것은 3장의 마지막 내용이다. 하나님이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불허하시는 내용이다.
왜 하나님은 누구보다 고생하고 희생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는가?
24절 - 모세는 능치 못할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한다. 24절은 25절의 간구에 대한 빌드업이라고 볼 수 있다.
25절 - 24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한 이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그의 간구 때문이다.
모세는 자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민수기 20장에 기록된 사건 때문이다.
[민수기 20:10-12]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0절 -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광야에서 ‘물’ 문제로 절정에 이른다. 광야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광야에서 그들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이다.
광야는 훈련의 장소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배우는 연단의 장소이다.
문제는 그들이 광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광야에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광야 가운데 있다면 왜 광야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광야로 보내신 이유는 내가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라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광야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상황에 대한 불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10절에서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라고 분노한다.
11절 - 모세의 분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결과로 귀결된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낸 것은 모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드러낸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12절 -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라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이스라엘의 갈증을 스스로 해결한 사건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사건은 아담과 하와가 단순히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은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은 것이 큰 범죄인가? 성경은 선악과라는 열매를 먹은 것과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친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보다 그 행동의 동기를 다룬다.
두 행동 모두 하나님 없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낸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피조물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있다.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의 존재를 더 선명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알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한 일에 대해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건으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모세는 원래 들어갈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아담은 원래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지 않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를 왜 이토록 단호하게 다루시는가?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을 단호하게 다루신 이유도 아담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모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레벨도 높다’
사랑은 최고의 가치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와 최상급의 레벨이다. 그 증거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신 것이다.
이보다 높은 사랑이 있는가? 왜 그렇게 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그 어떤 사람보다 높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꼭 이렇게 높은 레벨의 순종과 사랑을 요구하셔야 했는가? 낮은 수준의 사랑과 순종은 잘못된 것인가?
여기에 엄청난 함정이 있다.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높고 단호하다. 높은 것이 부담이 아니다.
영광이다. 누가 이 엄청난 특별 훈련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큰가?
부담인가? 그렇지 않다.
영광이다. 특권이다.
모세의 뜻은 ‘물에서 건져낸 자’이다.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미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모세의 삶이 부담인가? 영광인가?
‘하나님의 높은 영광에 관심이 없는 세대’ 우리가 가슴을 칠 일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못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단호한 요구는 부담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가 경험할 수 없는 더 큰 영광을 보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단호한 결정 뒤에 있는 뜻

[신명기 3:26-27]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27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26절 - 하나님은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라고 하신다. ‘그만해도 족하다’는 것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 약속의 땅에 대한 이슈를 다시는 이야기하지 마라.
(2) 여기까지 잘 달려왔다. 충분히 잘했다. 수고했다. 라는 하나님의 격려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모세 시대의 마무리와 사역의 마무리를 직접 하신다. 모세는 충분히 잘 달려왔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다. 우리 사역과 모든 일의 마무리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
시작을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면 마무리 또한 하나님이 하게 하셔야 한다. 이런 인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은 충성된 인생이다.
시작은 하나님이 하게 하시고, 마무리는 내가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특별히 성공한 사역일수록 자신의 주도권이 강하게 나타난다.
마무리의 주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모세의 마무리를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 이보다 큰 영광은 없다. 이보다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신명기 34:5-8]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5절 - 모세는 모압 땅에서 죽는다. 6절 - 모세의 무덤을 아는 자가 없다. 7,8절 - 모세는 죽을 때 백이십 세였다. 그러나 그는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한 건강한 모습 그대로였다. 죽을 때 사람들은 초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마지막을 지켜 주신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세의 형상은 절대적이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다. 그들이 얼마나 모세를 사랑했으면 삼십 일을 애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곡’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진정 어린 슬픔이다.
모세는 아버지였고, 지도자였고,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존재였다. 이런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또 그들이 모세의 무덤을 알았다면 그는 하나님과 같은 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불허하셨다. 만약 그들이 모세를 하나님처럼 여겼다면, 모세의 무덤을 우상화해서 섬겼다면 아마 모세는 무덤에서 일어날 정도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다’ 모세의 마지막 사명은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었다.
[신명기 3:28]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결국 마지막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강하고 담대한 여호수아를 세운다.
너무나 놀라운 장면이다. 마지막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강에서 건져낸, 죽었던 것과 같은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온전히 쓰임받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인생이다. 영광의 인생이다.
모세의 인생 어느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 하나님의 시간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찬 인생이다.
사모하자. “하나님,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것으로 가득차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