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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메시지 기쁨! 다음 차원의 돌파를 위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20260531 주일 메시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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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28-30]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1. 기쁨 - 다음 차원의 문을 열다

기쁨이 필요한 시대이다. 기쁨은 목표한 일이 완성되었을 때의 표현이다. 성경에서의 기쁨은 창조에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다.
[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심히 좋았다’(히, 토브 메오드)라는 말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완전히 부합하는 상태, 기능적으로 온전한 상태이다. 기쁨의 원천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변화의 특징은 ‘기쁨’이다.
토브는 ‘충만’의 상태이다. 부족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은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기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큰 기쁨은 없다. 기쁨은 언제나 ‘다음 차원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다음 차원으로 나아갈 때 정체기가 있다. 정체기는 처음 감동이 익숙해지는 순간이다. 정체기는 위험한 순간이지만 어떻게 보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강력한 디딤판이다. 정체기는 다음 단계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는 강력한 ‘신호’이다.

2. 정점(기쁨을 유지하는 법)

어떤 일이든 그 일의 정점이 있다. 정점의 순간은 소중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쇠퇴기’의 시작이다. 정점에는 기쁨이 있다. 하지만 기쁨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더 중요하다. 정점에는 많은 시험과 미혹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은 창조의 정점에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했다. 아담의 타락은 기쁨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사탄의 미혹은 강력하다. 하나님을 떠난 기쁨을 말한다. 세상의 미혹은 하나님을 떠난 삶에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완전한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떠나 보라. 사실은 그때부터 고통이다. 잠시 기쁨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기쁨은 잠시이다. 안개와 같다.
하나님을 떠난 ‘나’를 만족시키라고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기쁨은 거짓말이다. 창조주가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다른 차원의 기쁨

신앙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 정체기에서 다음 차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기쁨이라고 했다. 정체기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정점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
사역의 매너리즘이 누구에게 올까? 사역의 정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온다. 사역의 정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정체기는 없다. 왜냐하면 완성을 향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사역의 정점에서 정체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교만
이미 나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정점에서 판단자가 된다. 자신을 향한 메시지는 없다. 모두 남을 위한 메시지만 있다. 교만하면 불순종한다. 자신이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2) 기쁨이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은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었을 때이다. 출애굽의 진정한 기쁨은 ‘홍해’에서 옛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을 때이다. 홍해를 지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했다. (모세의 노래) 성경의 기쁨은 옛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에게 충만하다. 이 사람은 옛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영으로 충만하다. 성숙하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즐거움에 전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살아나는 일이 있다. 기쁨이 있다. 선한 영향력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정점과 정체기는 내 옛 자아가 다시 강력하게 죽어야 하는 시간임을 말한다.
봉사와 사역은 열심히 하는데 오히려 그 열심이 나를 드러내는 의가 될 뿐이다. 그래서 이 사람의 사역과 일에는 생명과 관계없는 인간적인 갈등이 더 증폭된다.

4. 세례 요한의 기쁨

[요한복음 3:29-30]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그 시대의 정점에 있던 리더였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주자였다. 엄청난 정점에서 세례 요한은 어떻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세례 요한은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마지막 세대의 영성이기 때문에 더 중요하다. 세례 요한은 29절에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라고 고백한다.
놀라운 말씀이다. 세례 요한은 정점에서 기쁨을 유지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다음 차원으로 넘어섰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의 기쁨은 ‘신랑의 친구’의 기쁨이다. 신부를 맞이하는 주인공인 신랑은 예수님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주인공의 자리에 두지 않는다. 세례 요한의 삶은 예수로 충만하다. 자신은 없다.
자신은 쇠하고 신랑이신 예수님만 흥하게 하는 기쁨이다. 오늘 조이풀교회의 다음 차원은 바로 ‘신랑의 친구’의 기쁨이다. 나를 넘어선 차원의 사역의 문을 열어야 한다. 신랑의 친구와 같은 세례 요한의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기쁨은 다음 차원의 기쁨이다. 조이풀교회는 다음 차원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100/500 비전은 다음 차원의 기쁨으로만 완성됨을 명심하라.

5. 물 떠 온 하인의 기쁨

[요한복음 2: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혼인 잔치의 절정은 ‘포도주’에 있다. 포도주가 빠진 혼인 잔치는 상상할 수 없다. 오늘 모든 사람이 놀랄 만한 극상품의 포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예수님께서 물로 극상품의 포도주를 만드셨다. 이 일을 위해 쓰임받은 사람들이 물 떠 온 하인들이다.
물을 항아리에 가득 채우는 이들의 수고가 있었다. 이들의 수고는 그냥 수고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에 대한 순종과 수고이기에 헛수고가 아니다. 예수님을 위해 헌신된 수고는 반드시 기쁨으로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과 관계없는 수고에는 기쁨이 없다. 헛수고이다. 이제 조이풀은 예수님과 관계된 수고를 통한 물 떠 온 하인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물을 채우는 시간은 지루함이 있다. 어려운 시간이 있다.
물 떠 온 하인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신다. 이 수고가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될지를 아신다. 물 떠 온 하인과 같은 다음 차원의 기쁨을 누릴 진정한 제자들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늘 조이풀은 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1) 사역의 단계로 나아가라
(2) 봉사와 섬김의 단계로 나아가라
(3) 성숙한 리더의 단계로 성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