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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 6 사방이 막혀 있다. 하나님이 살길을 내시다 (선택과 주도권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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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7:12-16]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1. 사르밧 과부의 때

마지막 때는 고난의 때이다. 가뭄과 기근의 때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인물을 찾는다면 ‘사르밧 과부’라고 할 수 있겠다.
사르밧 과부가 처한 상황은 기근으로 인해 땅이 소산을 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한 상황이다. 황폐한 때에 가장 필요한 도움이 무엇인가?
‘황폐함’
황폐함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떤 소산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을 말한다. 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때이다.
지금 인간들 안에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인가? 소산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두렵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의 이유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이다. 신앙적으로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신앙의 황폐함을 경험하는 시기가 있다. 이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이다. 이때는 왜 이런 상황이 내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질문은 결국 ‘하나님, 당신은 선하신 분입니까? 당신은 좋으신 분입니까?’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향한 질문이다.
인간이 신이 없다는 무신론을 선택하는 이유는 오히려 신의 존재에 대한 강한 질문으로부터 나온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 있는가?’라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답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신은 없다’라며 스스로 무신론자가 되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신에 대한 무관심’보다는 ‘신에 대한 반발심’이 더 강하다.
‘엘리야’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상황이 그렇다. 황폐함의 때 엘리야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1) 까마귀의 공급을 통해 살아가는 엘리야
[열왕기상 17:3-7] 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엘리야의 상황 - 시냇가에 숨고(3절) : 숨어 지낸다는 것 자체가 정상의 상황이 아니다. 위급한 상황이다. / 까마귀를 통해 아침과 저녁에 떡과 고기를 공급(6절). 까마귀를 통해 공급을 받는 엘리야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기가 막힌 노릇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무가치하게 느껴졌을까? 인간의 가장 큰 위기는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게 느껴졌을 때이다. 이때가 가장 힘든 시간이다.
(2) 사르밧 과부를 통해 생존하는 엘리야
까마귀의 공급이 끊어지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다.
[열왕기상 17:9 새번역]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까마귀의 공급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제는 과부에게 가서 먹을 것을 청해야 하는 엘리야의 상황을 보라.
[열왕기상 17:10-11 새번역] 10 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11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황폐함의 때에 땔감을 줍고 있는 과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청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이니 당당하게 물을 달라고 요청했겠는가? 11절에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할 때 엘리야가 여인을 불러서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요청한다. 엘리야는 지도자이다. 어려운 사람을 돌보아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절대 도움이 필요한 과부에게 물과 먹을 것을 요청하는 엘리야의 마음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고, 과부에게 물과 음식을 요청해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을 절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누구인가?
[열왕기상 17:12 새번역] 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사르밧 과부는 ‘황폐함’의 상징이다. 내일이 없는 여인이다. 여인이 직접 말한다. “저에게는 빵 한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 땔감을 줍고 있는 이유는 이것으로 하나뿐인 아들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먹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절박함을 설명하는 여인에게 엘리야는 여인의 설명이 무색하게 자신을 위해 음식을 먼저 만들라고 말한다.
[열왕기상 17:13 새번역]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황폐함의 때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은 내일이 없는 ‘사르밧 과부’이다.

2. 선택과 주도권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다. ‘선택’이다.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를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선택은 절대 사르밧 과부를 택할 수 없다.
‘인간의 관점’
“하나님, 엘리야를 먹이려면 먹일 수 있는 사람을 보내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큰 일을 행하시려면 능력 있는 사람을 선택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엘리야보다 더 절박한 사람에게 엘리야를 보내신다.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이 상황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선택’이다.
‘선택과 주도권’
선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한 사람의 ‘주도권’이다. 선택은 결정했다는 것이다. 마음을 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하는 사람에게 주도권이 있다.
예를 들어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이 좋은 선수를 선택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선택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그 선수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려고 한다. 주도권을 영어로 말하면 ‘Initiative’이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는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있다. ‘주도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능가하는 사도적 사역을 감당하도록 예수님이 전적으로 그들의 인생 안에 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이신다는 의미이다.
과부가 엘리야를 섬기겠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신다. 하나님이 과부를 선택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신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과부와 엘리야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반응했다. 이 점이 두 사람의 위대함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주도권’에 있다. 누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3. 주도권과 시선의 이동

주도권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동된다.
인간은 언제나 ‘과부의 통’을 본다. 그리고 “가루가 한 움큼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공급한다.”
“기름이 조금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공급한다.”
“오늘 먹으면 내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일도 내가 공급한다.”
시선의 이동은 ‘과부에게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있다.
통을 보면 절망한다. 하나님을 보면 믿음이 생긴다.
상황을 보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보면 가능하다.
내 부족함을 보면 두렵다. 하나님의 공급을 보면 담대해진다.
‘내 상황이 어떠한가?’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내게 무엇이 있는가?’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면 내가 가진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이 결정한다.’
절대적 공급처,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리고 그분께 내 모든 주도권을 드려라.
‘하나님의 주도권은 우리의 부족함보다 먼저 움직인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야뿐 아니라 과부도 살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