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2-25]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1. 십자가
오늘 말씀을 보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이 말씀을 풀어내는 중심 키워드는 23절의 ‘십자가 복음’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아의 모습에 합당한 ‘표적’을 구했다.
그런데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이시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아니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
그 당시 헬라인(이방인)들은 ‘철학적 논증과 지적 설득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중심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헬라인은 그들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언제나 그들에게 합당한 논증적 능력을 요구했다.
헬라인은 복음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인정하는 수준의 지혜와 지식의 판단력으로 복음의 가치를 판단하려고 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복음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23절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인정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헬라인들이 인정할 만한 지적 가치와 논거의 가치의 수준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바울은 단호하게 우리가 전하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걸림돌’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힌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보통 인간의 생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
23절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걸림돌이 된 십자가’(십자가의 실족), 키에르케고르
“십자가는 언제나 거치는 것(갈 5:11)이었다. (십자가의 실족)
기독교에서의 실족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속죄에서 고민하는 양심의 싸움을 제거한다면, 그때는 교회의 문을 닫거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교회를 온종일 문을 열고 영업을 하는 오락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좋다. 실족의 가능성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사람들은 전체 세계를 기독교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즉, 세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언제나 실족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 거리끼는 것, 걸림돌’이 된다.
2. 십자가, 나약함
현대 사회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보여지는 십자가는 나약함 그 자체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죄인의 처참한 모습이다. 나무에 달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1)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
오늘 현대 사회의 특징은 나약함과 무기력함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약함을 보이는 순간 그는 세상에서 패배자이며, 경쟁에서 낙오된 자가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특징은 본인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나약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절대적 힘(하나님)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인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불안하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쌓기로 결정한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드러내야 생존할 수 있었다.
‘니므롯 - 바벨의 원조’ (강함의 세계관)
[창세기 10:8-10]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니므롯이라는 용사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을 과신한 ‘용사’(폭군)이다.
힘의 세계관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그가 머물렀던 땅이 바벨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적한 바벨탑이 만들어진다.
바벨탑의 핵심은 ‘인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라는 것이다.
[창세기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 그래서 인간의 이름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리자.”
인간에게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 없다.
현대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교회가 약해진 이유는 ‘십자가 복음’을 걸림돌로 여기고, 메시지와 신앙에서 덜어 냈기 때문이다.
자기 힘과 자기 능력, 경험, 판단을 과신하니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는다.
(2) 사탄의 조롱
사탄은 예수님에게 ‘자신의 힘’을 사용해서 사탄을 이겨 보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은 가장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무기력한 예수님을 떠났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약한 예수님을 은전 30에 팔아 치운 가룟 유다, 나약한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를 보라.
제자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었던 가장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3) 부활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죽으셨던 예수님은 약속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여 주신 사건이다.
가장 비참하고 약한 고난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가장 영광스럽고 강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낸 장소가 되었다.
바울이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 이유는 이 비밀 때문이었다.
그는 진정한 승리가 십자가 복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3. 선재 이야기, ‘은혜를 입다’
인간의 힘이 바닥이 된 순간, 가장 나약한 그 순간이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는 실제적 공간이 된다.
여기에 엄청난 영적 원리가 있다.
가장 처참한 십자가, 걸림돌과 같은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다.
가장 무기력한 선재의 모습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관점으로 가장 나약한 선재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평안으로 가득했다.
육신은 연약하지만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가 선재의 생각과 마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재가 계속 감사하다고 말한다.
“물 마실 수 있어 감사, 미음이라도 먹을 수 있어 감사, 사업을 할 수 있어 감사, 입찰을 딸 수 있어서 감사,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어 감사,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 감사”라고 말한다.
“목사님,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몸이 회복되면 다시 예배팀에 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가진 행정력으로 예배팀의 행정을 잘 돕고 싶어요.”
너무 놀라운 고백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1%의 원망도 없다. 억울함도 없다. 절대 긍정, 절대 믿음을 선포하며 나아가는 선재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었다. 선재는 오히려 다른 어려운 사람들과 교회와 부족한 종의 건강을 걱정했다.
함께 예배했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가 선재의 작은 방에 가득했다.
강한 임재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리고 선재에게 엎드려 기도를 받았다.
선재가 또박또박 말을 곱씹으며 축복한다.
엄청난 은혜가 부어졌다.
엄청난 십자가 복음의 실존 앞에서 나의 교만, 자만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정말 교만한 존재구나.’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같이 나를 덮었다.
십자가 복음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십자가 복음을 통한 절대적 은혜를 다시 경험해야 한다.
고난이 있는가? 어려움이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과 어려움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고난과 어려움은 더 깊은 단계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게이트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난과 어려움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 된 교회를 향한 메시지이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깊은 계시와 실재를 갈망하는 조이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낮은 곳으로, 포로 된 자, 묶여 있는 자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라.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할렐루야!

